GLITCH WORLD
글리치(Glitch)는 일시적인 오류나 사소한 결함을 뜻한다. 미디어 영역에서 자주 쓰이는데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가 있다. 버퍼링으로 인해 게임이나 영상의 화면이 “깨졌다”고 하는 상태가 바로 글리치다. 완전해 보였던 형체가 직각의 픽셀들로 파편화된 오류의 이미지인 글리치, 여기에서 임우재는 도시의 형상을 발견한다.
<GLITCH WORLD> 전시 전경
공간과의 상호작용과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공간에 대한 의미와 경험이 축적될 때, 추상적인 공간은 구체적이고 정서적인 장소로 전환된다. 그러나 기능성과 효율성을 위해 철저하게 구획화된 근대적인 도시에서 인간은 장소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다. <Glitch World> 는 이렇게 장소성이 상실된 도시 공간을 하나의 ‘흘러가는 공간’으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쉴새 없이 도시 공간을 지나가고 서로 마주치지만 그들은 그 공간과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과 관계 맺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관계 맺음없이 ‘흘러가는 공간’을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비장소(Non-Lieu)’라고 칭한다. 전통적인 장소와 달리 관계성, 역사성, 정체성이 상실된 비장소로서의 도시는 미디어에 의해 그 비장소적 정체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는 영상매체와 스마트폰을 통해 더 자주 그리고 쉽게 항공사진의 이미지를 접하게 되었다. 방송, 영화, 뉴스는 어떤 도시를 보여주고자 할 때, 드론으로 촬영한 도시 전체의 조망을 제시한다. 그리고 스마트폰 지도앱을 사용하는 동안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전지전능한 시점으로 도시를 보고 사용한다. 이 모든 시점과 이미지는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는 직접 경험하거나 그릴 수 없는 것이다. 도시에 대한 기억, 경험, 이미지의 다수는 이처럼 미디어에 의해 간접적으로 매개되며 직접 경험되기보다는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미디어와 실재가 뒤엉킬 때 생기는 시공간적 틈을 탐구해온 임우재는 도시에서 작동하는 미디어의 영향력에 대한 관심으로 한층 다가서며, 이번 전시 <Glitch World>에서 도시의 시공간적 단면들을 픽셀로 하는 ‘글리치’를 선보인다. 설치와 프로젝션으로 구성된 세 개의 <Glitch World>는 흘러가버리고 있는 도시의 시공간적 파편들로 이루어진다. 각 글리치에는 크기와 모양, 높낮이가 제각각 다른 공간의 조각들 위로 흐름과 속도가 다른 여러 시간의 조각들이 흐른다. 때로는 정적으로, 때로는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레이어는 작가가 여러 도시에서 직접 수집한 장면들과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로 구성된다. 미디어를 통해 접한 영상들과 작가가 직접 수집한 장면들이 뒤섞인 도시 단면집은 도시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상, 그러니까 미디어에서 출처 불명으로 채취된 이미지와 실제 경험, 기억, 감각이 뒤섞인 상태와 유사하다. 이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과 복합적인 감정, 사람과 장소 또는 장소와 장소 사이의 상호작용이 와해되어 그 파편들이 무분별하게 산재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거주하고 생활하지만 경험과 감각은 갈수록 불분명해지는 도시, 이 곳에 대한 나의 기억과 경험, 감정은 어디로 갔기에 로딩되지 못하고 있는가? 경험과 감정이 휘발되어 구획과 그리드만이 남은 도시는 데이터가 온전히 로딩되지 않은 채 화면이 깨지고 어그러진 글리치를 닮았다.
임우재가 글리치로서의 도시를 형상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의 방식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형태들의 조합 위에 비물질적인 영상을 덧입히며 공간의 물질성과 시간의 운동성을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복합체로 압축한다. 이렇게 미디어와 실재, 공간과 시간이 뒤섞인, 단번에 이해될 수 없는 다층의 혼성 공간을 만든 작가는 그 복잡한 층위들 가운데 반복되는 횡단들, 아주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공간 점유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실상 미디어에서 파생된 수많은 이미지와 영상들은 감각과 인식의 영역에 흘러 들어왔다가 잠깐의 잔상만 남기고는 형체도 없이 흘러가버린다. 임우재는 그와 마찬가지로 도시를 흘러가듯 지나가는 반복적인 움직임의 장면들을 조합하여 <Glitch World>를 구성한다. 구획화된 거리와 횡단보도를 가로지르고 지하철 출구를 오르내리는 일정한 움직임, 일렬로 나열된 자동차, 플랫폼을 출발한 지하철이 만드는 선적이고 반복적인 리듬은 이를 바라보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미디어적인 시간의 단편성을 인식하게 한다. 이로써 도시라는 글리치는 일정하게흐르는 균질한 시간성 대신 이를 테면 GIF파일 같은 찰나의 유동적인 시간성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공간으로 설명된다.
<GLITCH WORLD> 전시 전경
도시라는 글리치에 온전히 로딩되지 못 했던 도시의 시공간에 대한 기억과 경험, 인상은 대신 독특한 형태의 설치로 그 흔적을 드러낸다. 공간에 얽힌 우리의 인상은 지도나 화면에서 보이는 것 같은 깊이가 읽히지 않는, 깔끔하게 재단된 매끈한 단면처럼 생기지 않았다. 이에 작가는 형태와 크기, 높낮이가 다양한 리드미컬한 설치물을 구축함으로써 그 균일하지 않은 인상을 물리적으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재현한다. 얕고 낮은 깊이와 높이, 양감은 <Glitch World> 드로잉에도 부여된다. 이는 공간에 대한 기억, 경험, 인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작가가 흔적을 남긴다고 표현한 이 과정은 공간에서 만들어진, 그리고 공간에 의해 발현되는 기억과 감정, 경험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남기는 것과 같다. 매일같이 지나는 수많은 거리와 횡단보도, 자주 시선이 닿는 빌딩의 파사드, 지하철 출구와 플랫폼, 반복되는 일상의 장면들에 깊이 박히거나 겹겹이 쌓인 기억과 경험의 조각들의 그 보이지 않는 흔적을 말이다.
흘러가는 공간이라는 비장소로서의 도시를 미디어와 뒤얽힌 글리치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임우재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시공간의 파편들을 포착하고 한데 모아 하나의 의미 세계를 구축하는 실천을 통해 장소에 대한 감각을 일깨운다. 그 감각은 설치와 프로젝션 맵핑을 통해 공간과 시간, 움직임의 조각들이 합쳐지고 겹칠 때 생기는 틈에서 발생한다. 특히 겹쳐진 시공간의 레이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디어와 실재, 시간과 공간의 틈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서로 교차할 때, 새로운 레이어들, 그러니까 도시에 대한 또다른 의미와 관계가 생겨난다. 관계 맺음없이 그저 지나가버리는 공간이 비장소였다면, 그 움직임들이 서로 얽히고 교차하고 충돌하며 의미와 관계를 만들어내는 공간은 장소이다. 이러한 점에서, <Glitch World>는 오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소와 비장소가 서로 얽히고 서로에게 침투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장소와 비장소가 얽힌 그 불분명한 경계를 오가는 임우재의 작업은 ‘비장소’의 형식을 빌려 도시에 대한 기억, 경험, 인상, 감정을 그것이 전개되고 있는 지금 여기로 불러들여 도시라는 ‘장소’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 ‘장소’로서의 도시는 관람객의 시선과 사유가 <Glitch World>에 중첩된 레이어 사이사이에 틈입할수록, 그래서 도시에 얽힌 개개인의 기억과 경험, 관계들이 되살아날수록,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글: 신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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