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력』 Errantry

제4회 Peep!展

2014_0724 > 2014_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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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권동현_김기범_김한울김혜리_백경호_우찬송_홍지훈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주제에 관해서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 소설에서 몽롱한 이상주의에 대한 돈키호테의 합리주의적 비판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글도 있다. 또 다른 글들은 이 소설에서 바로 이상주의 자체의 환호를 보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들은 소설의 근본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편향을 찾아보려는 것이기 때문이 모두 다 낡아 빠졌다.」 (밀란 쿤데라,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권오룡 옮김)에서) 『편력』이라 지은 이 전시의 제목은 세르반테스가 그 행적을 기록한 위대한 편력기사 돈키호테에 대한 오마주다. 이번 전시는 송원아트센터에서 2007년부터 열어 온 『Peep!』의 네 번째 프로젝트로서 기획되었다. 『Peep!』은 신진 작가들을 조명하고 동시대 미술계에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취지의 프로젝트다. 젊다든가, 신진이라든가 하는 수식어는 특히 미술계에서는 쓸 때마다 적용 범위가 애매한 말이기는 하지만, 이번 전시의 출연진은 학부를 갓 졸업한 이들까지 포함하는 여지없이 젊은 작가들이다.『편력』은 이 전시가 그들의 작업에 주목한 이유를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서문을 빌어 그 의미를 설명해 보려 한다. 이는 작가들 못지않게 제도적 입지가 불안정한 무명의 젊은 큐레이터의 욕망이기도 하며, 또한 바라건대 나와 같은 세대의 예술을 위한 한 가지 유의미한 관점이기도 하다. ‘편력’에는 여행, 방랑, 수행 등의 뜻이 담겨 있지만, 여기서 그중 가장 중요한 의미는 ‘모험’이다. 그러나 이 모험이란 것이 놀이공원이나 영화 및 게임에서 종종 그려지는 무슨 어드벤처(adventure)와 같은 오락적 이미지로 읽히지는 않길 바란다. 또한 편력은 요즘 흔해진 해외 여행이나 견문을 넓히는 유학과도 별 상관이 없다. 현대 문명을 거스르는 유목민(nomad)의 삶이나, 서슬 퍼런 칼을 품은 방랑자(vagabond)의 여정과도 거리가 멀다. 작금에 유행하는 모험에 대한 이런저런 선입견을 물리친 이 개념이 뜻하는 것은 미리 선을 그어 두자면 이런 것이다. 편력은 이 세계의 ‘마법’에 대항하는 여정이다. 이는 돈키호테가 활약하던 17세기 초뿐 아니라, 오히려 동시대의 현실 속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모험이다.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에서 근대와 함께 탄생한 그의 소설을 높이 평가한다. 신이 떠나간 시대, 지고의 심판관이 사라진 세계는 돌연 지극히 애매한 모습을 드러내며, 돈키호테의 편력은 그런 세계에 가득한 불확실하고 상대적인 진실들과 맞서는 모험이었다. 니체는 19세기 말에 ‘신은 죽었다’고 하여 센세이션을 낳았지만, 사실 계몽주의와 함께 근대를 살아가던 지식인들은 이미 그런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직 젊은 데카르트가『방법서설』(1637)을 쓰기도 전에 시골 마을을 뛰쳐나간 돈키호테는 기사로서 신의 뜻을 따르는 성실한 기독교인이지만, 그의 혼란한 모험 속에서 신의 뜻이 과연 무슨 뜻인지는 허공에 흩어져 버린다. 이 소설을 읽으면, 그 묘미는 이쪽저쪽을 판단할 수 없는 혼돈 자체에 있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문학 주인공의 활약을 신봉하여 모방할 때는 미치광이 같지만, 뜻밖에 청산유수 같은 언변과 교양 있는 예절을 보일 때는 고결한 인품을 드러낸다. 그의 충직한 하인 산초 판사도 비슷한 의미에서 무식한 촌놈인지 영리한 자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또한 돈키호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그의 행태에 감탄하거나, 이 선량한 미치광이를 두들겨 패거나, 그의 광기에 동조하는 척 일을 꾸미고 즐거워하는 다른 수많은 인물들이 서로 뒤얽힌다. 이 세계의 진실은 선악과 시비의 기준이 될 어떤 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모호함에 더 박차를 가하는 ‘마법’이라는 장치가 있다. 가령, 아름다운 둘시네아 아가씨를 모셔 오라는 돈키호테의 성화에, 귀찮은 산초는 아주 못생긴 시골 처자를 가리켜 그녀라고 해 버린다. 그러자 돈키호테는 이 처자를 보고 실망하거나 그의 연인이 아니라 부정하는 대신 이렇게 반응한다. 오, 나쁜 마법사들이 또 내 눈에 마법을 걸었구나. 이하와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마법은 ‘진실’의 왜곡이자, 그것을 사람들의 눈에 자명한 현실로 보이게 하는 힘이다. 다시 말해, 이는 의혹과 상대성을 감춰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세계를 만드는 환상으로서, 거기에 속지 않는 돈키호테의 낭만적 이상과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마 이 마법은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던 17세기보다, 모든 것을 수긍하는 다원주의를 잇는 동시대의 현실 속에서 더 보편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아서 단토는『예술의 종언 이후』(1997)에서 거대서사의 종언과 함께 도래한 예술에 있어서의 다원주의에 갈채를 보냈다. 작품의 겉으로 드러난 형식을 두고 이것이 참된 예술이네 아니네 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는 시대적 정서에 잘 맞는 주장으로서 당대 예술계의 긍정적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반면, 그가 다원주의와 함께 제기한, 예술의 본질에 대한 정의가 절박하게 필요해졌다는 주장은 (이를 비판하려는 시도를 빼면)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단토가 말하는 다원주의는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1964)와 함께 명백해진 지각적 식별불가능성에 근거한다. 평범한 비누 상자와 눈으로 구분되지 않는 「브릴로 박스」조차 예술로 인정받았으니, 이제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술의 본질을 찾으려 할 때, 거기에는 예술이 어쨌든 평범한 사물과 뭔가 다른 비범한 것이라는 전제가 놓여 있다. 그런데 양자를 구분하는 전통적 기준은 다 쓸모 없어진 것이다. 작품들 간의, 혹은 예술과 다른 문화적 산물들 간의 민주적 평등을 옹호하는 이들은 단토를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학적, 미술사적 신념이 어떻든 간에, 예술은 이미 비범한 취급을 받고 있다. 미술 시장에서 매겨진 높은 가격, 작품을 범접할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드는 전시 제도, 역사적 보물처럼 다루는 보존 제도를 통해서, 혹은 전시 홍보물들 속에서. 

문제는 예술이 예술인 이유, 혹은 각 작업이 비범한 이유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이 부재할 경우, 작품들이 마법에 의존해 예술로서의 ‘자명한’ 지위를 획득하곤 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삶이라는 신화든 예술계의 제도적 권위든, 마법은 모더니즘 이후로 예술이 가장 적대시해 온 진부한 환상이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현재 예술계에 속한 시점에서 바라볼 때 마법과 손잡는 (더 있겠지만) 두 가지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은 각각 ‘나르시시즘’과 ‘현학(衒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며, 그때그때 다르긴 하지만 비교적 흔한 현상이다. 미리 요점을 짚으면, 둘은 작품에 허세를 더해 심오한 분위기를 지어내는 관습이다. 

나르시시즘은 작가의 내밀한 욕망의 노출, 사연 및 심정의 토로, 혼자만의 연구에 몰입한 고상한 자폐증 등을 느슨하게 묶는 이름이다. 예술이 저자 자신을 소재로 삼는 것은 잘못이 아니며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의 어폐는 자아를 대상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심취해 버린다는 데 있다. 이는 작업을 시작하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만약 지금이 독재 정권이 지배하는 시대, 혹은 조지 오웰이 그린 ‘1984년’처럼 개인의 욕망이 철저히 억눌린 시대라면 단지 자아를 한껏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주의가 현실이며, 미디어는 온갖 욕망의 표현을 계속 생산하고 SNS에는 개인들의 정치적 발언과 진부한 일기가 수없이 올라온다. 나르시시즘은 분명 흥미를 끌지만, 대중매체가 시청률을 올리는 전략을 반복하는 한에서 그렇다. 

다른 한편, 현학은 작품 안팎에 난해한 이론적 용어나 문장을 문맥 없이 차용하는 습관을 가리킨다. 이는 제도적 관행이라는 점에서 나르시시즘보다 훨씬 큰 문제다. 작가나 기획자가 작업과 얼마나 관련 있는 어휘를 어느 만큼 소화해 쓰는지는 몇몇 전문가나 신경 쓸 법한 소수의 관심사다. 그 반면, 독해가 힘든 글의 수수께끼 같은 느낌을 빌어 예술적 비범함을 가장하는 전략은 작금의 예술계에서 널리 통용된다. 비평이 현재의 문제의식 하에서 과거의 이론을 다시 해석하여 채택한다면, 현학은 그 권위에 의존하여 자신의 의미와 정당성을 찾는다. 후자는 마치 돈키호테가 줄줄 외우던 기사도 책 구절들처럼, 길게 읊을수록 점점 더 현실의 논점을 벗어난다. 그러나 이는 20세기의 전위적 예술 운동들을 계승한 현재 예술계가 승인하는 담론 형식이기도 하다. 거기서 뭔가 과도한, 시대착오적 성격을 느끼지 않는 이들에게 지금 하려는 편력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할 것이다. 

모험을 찾는 것은 돈키호테보다 우리 시대에 더 어려운 일이다. 그가 용감히 맞서 싸우던 근대(modern)의 마법은 근대 ‘이후'(postmodern)를 거치며 세계에 널리 속속들이 스며들었다. 다원주의는 배타적 진실을 강요하던 소수의 거대서사를 전복하고, 대신 수많은 전문 영역과 개인적 서사들에 자명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제 상대성도 어떤 의미로는 세계의 안정을 위한 마법의 일부가 된 듯 보인다. 선악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정치적 상대성은 기득권 유지에 기여하며, 서점에는 저마다 인생의 진실에 대해 강의하는 온갖 자기계발서가 길 잃은 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는 심지어 가장 전위적인 영역이라 가정된 동시대 미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예술에 있어서의 다원주의는 정확한 실체도 없이 권력만 존재하는 느슨한 제도적 담론에 불과한 예술계의 권위에 기대는 현실로 귀결되었다. 여기서는 양립할 수 없을 듯한 것들도 무난히 공존할 수 있다. 설혹 예술이 다시 전위적 영역을 모색한다 해도, 제도 바깥이란 게 과연 존재할까? 여기서 제도란 현 사회의 제반 현실이나 작가를 등단시키는 공모전 등의 외면적 여건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 나르시시즘이나 현학 같이 예술계 구성원들의 자아에 내면화된 관습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그러나 예술의 목적이 현실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자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설령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드넓고 자명한 현실의 한계를 초월해 넘어가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조건은 마법에 손상을 가하고 혼란을 낳는 것, 즉 제도화된 일상적 세계 이면의 근본적 상대성을 다시 드러내는 데 있다. 이 전시는 그런 의미에서 다시 모험을 열어 밝히는 한 가지 길을 조명한다. 

편력은 밖을 향한 모험이다. 다만 여기서 밖이란 이쪽의 자폐적, 제도적인 틀 안에 끌려들지 않은, 상대편에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를 뜻한다. 돈키호테 역시 자신의 서재에 곱게 머물렀다면 아무 소동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안정된 인식의 틀을 깨고 나간다는 점에서, 지금 말하려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보면 해프닝과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나 해프닝이 즉흥적, 연극적인 것이라면,편력은 보다 길고 소설적인 모험을 나타낸다. 이미 다원주의가 뿌리내린 오늘날, 낡고 보수적인 인식을 순간의 충격을 통해 전복하는 전략이 과연 계속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보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불확실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즉,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상대적인 여러 존재가 하나의 시공간에 머무르며 빚는 방황의 깊이다. 쿤데라가 ‘소설’이란 말로 의미했던 이 복잡하고 혼란한 상대성은, 다원주의가 요구하는 쿨한 상대성에 비해 이 세계의 훨씬 깊은 진실에 닿는다. 정파적, 도덕적 확신에 근거하는 사회 참여적 예술이나 단지 쇼킹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골몰하는 작업은 거기에 다가갈 수 없다. 

불확실성의 깊이는 수평뿐 아니라 수직적인 상대성 또한 암시한다.『편력』에 참여한 작가들은 한눈에도 평범해 뵈는 소소한 일상과 사물들, 익숙한 장소와 제도에 개입해 들어간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 대상들은 작업 속에서 하나의 주제 하에 녹아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외의 존재 의미를 드러내며 소설적 서사 속으로 흩어진다. 거기서 미끈한 예술적 기교를 찾기란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작가들은 자신의 뜻대로 주무를 수 없는 물리적, 사회적인 현실과 대면함으로써 자폐적 환상에 빠지지 않되, 그렇다고 해서 자아를 애매한 현실 속으로 망연자실하게 흘려보내는 것도 아니다. 개인이 어쩌지 못할 거대한 현실에 몸을 맡기고 적응하는 것 또한 동시대의 진부한 서사들 중 하나다. 반면, 예술의 편력은 상대적인 현실에 다시 상대적으로 맞서는 또 하나의 결단을, 즉 돈키호테와 같이 기이한 확신에 찬 모험을 감행할 때 시작된다. 세계의 상대성을 진정한 의미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기댈 곳 없이도 흔들리지 않는 이상이다. 그리고 이 전시는 그런 힘을 예감하게 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조명한다. 

​『편력』의 작가들은 ‘예술 밖’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그들의 작업은 예술가의 자아, 혹은 예술 제도라는 보호막 밖에 실재하는 현실의 무게를 선명히 드러낸다. 그것은 작가가 좌우할 수 없는 심상치 않은 대상일 수도 있고, 예술의 고상한 취지가 먹히지 않는 복잡하고 넓은 세계의 단편일 수도 있다. 예술과 현실의 이런 공존은 부조리, 희극, 또는 모순의 광경을 빚는다. 다만 이 작가들은 그런 광경을 강 건너에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운데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 예술은 불확실한 현실에 처한 작고 유한한 존재인 한편, 조용한 물을 휘젓고 불확실성에 깊이를 더하는 장본이기도 하다. 이 깊이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리킨다거나, 주체를 비판한다거나, 무슨 질서를 해체하고 이분법 너머의 감각을 제시한다는 등 판에 박은 비평적 수사나 추상적인 논리에 기대지 않는다.『편력』의 작업들 속에 나타나는 낯익은 존재들 간의 경험적인 관계는 논리나 감각보다 더 모순을 설득력 있게 포착하며, 또한 그 구체적 내용으로 인해 역으로 보편성을 얻는다. 다른 한편, 그 속으로 관철되는 작가들 각자의 편력은 자명한 현실에 혼란을 가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 혼란을 직접 감당하는 미적 정체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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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현_철거 표식을 위한 위장무늬 #2_디지털 프린트_150×225cm_2012

​권동현_모각-이미 있는 조각 작품을 보고 그대로 본떠 새김 #1_콘크리트 설치_35×7×8.5cm_2012

비천한 삶의 흔적들에 새겨진 순수한 아름다움을 기록하는 권동현의 순례에 대하여

권동현의 작업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미적 거리를 극적으로 좁힌다. 「철거 표식을 위한 위장무늬」시리즈(2011-2013)는 재개발로 인해 강제 철거되는 건물의 벽에 남겨지는 철거 표식을 가리려는 의도로 시작된 작업이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 ‘위장무늬’의 목적은 점차 버려진 지역의 폐허처럼 몰락한 모습에 마치 화장을 하듯 순수한 미적 형식을 가미하는 것으로 옮아간다. 이 작업에 나타나는 미는 작가가 창조한 것이라면, 「모각: 이미 있는 조각 작품을 보고 그대로 본떠 새김」 시리즈(2012-2013)에서 조명받는 아름다움은 그가 단지 발견해서 빌려 온 것이다. 여기서 권동현은 길을 걷다 마주친 대상에서 보이는 순수한 조형미를 조각으로 본떠 기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작은 조각품은 달동네 골목에서 볼 법한, 포장되지 않은 거친 형태의 계단을 재현한다. 일상적 언어와 통념을 기준으로 본다면, 작업에 일견 나타나는 이미지와 작가가 지향하는 목적 사이에는 현저한 간극이 있다. 물론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 곁에 종교가 있는 것처럼,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도 천상과의 연결 고리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순수한 아름다움? 생존이 당면 과제인 곳에서 미학 이론서들 속에나 존재할 듯한 미적 이상은 아마 무의미할 것이다. 이런 모순을 암시하듯, 그의 작업들은 그 심플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위화감과 거기서 오는 떨림을 간직한다.  그러나 이 작가의 작업에서 남루한 형식과 순수한 내용을 결합하는 것은 그의 자의적인 논리가 아니다. 인간은 때로 모순된 것들을 동시에 욕망한다. 집이 철거되면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근심하면서도, 더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고 싶은 마음에 재개발을 바라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사회의 별로 아름답지 못한 현실에 늘 비판적 관심을 가지면서도, 순수한 조형미에 끌려 거기에 천착하는 예술가도 있다. 철학서나 추상 예술에서 등장하는 모순은 학생들의 공허한 논쟁거리에 그치기 쉽다. 그러나 한 인간이 처한 현실적 상황에 실천적 문제로서 던져진 모순은 절박하고 답 없는 번민을 가져온다. 권동현의 작업은 후자를 나타낸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관념적 시뮬레이션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철거 지역이나 골목의 삶에 깊숙이 발 들이는 한편, 다시 그 속에서 조형미를 추구하는 여정을 통해 자신의 작업에 역설적 깊이를 더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미적 형상은 비록 희미하지만 구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업들은 일순 거리가 사라진 두 세계가 부딪혀 생긴 조용한 종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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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_ZF39_단채널 영상_00:09:09_2012

​김기범_낭독방_설치_200×150×120cm_2013

사물을 둘러싼 접근 형식들의 간극을 벌려 들어가는 김기범의 작업에 대하여

김기범은 주로 일상적 대상들을 작업의 소재(subject matter)로 한다. 기본적으로 그의 작업은 사회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오브제의 힘을 빼거나, 역으로 대수롭지 않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작은 변화로도 이런 과정은 부조리의 어감을 머금는다. 왜냐하면 일상 속에서 사물들이 갖는 중요한, 혹은 하찮은 의미는 현실의 질서와 역학관계를 반영하며, 따라서 그런 의미의 경중을 뒤바꾸는 일은 혼란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런 과정에서 사물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사물의 즉물적 형태, 혹은 특정 목적에 따른 기존의 디자인에 관심을 두고 기능을 관찰 및 가공한다. 즉, 소재에 자의적 감상을 강요하는 대신, 가능한 한 보존된 원래 형태에서 그 역할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대상들이 별로 가공되지 않은 일상적 모습 그대로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위와 같은 작업의 결과, 김기범의 소재는 기존의 현실적인 의미와 새로 부여된 예술적 기능이 공존하는 거점이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에서 일상적 오브제는 단지 주관적 관념을 대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시차(視差)적 간극의 주축이 된다. 낙차가 클수록 그 여파도 크고 강해진다. 「ZF39」(2012)는 2차 대전 때 독일군이 쓰던 저격용 조준경으로 서울 풍경을 바라보려는 단순한 흥미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그러나 이 물건은 비극적 역사를 담는 흔치 않은 수집품이자, 국내에서 법으로 금지된 총기류와 관련된 오브제다. ‘ZF39 ‘의 현실적 무게는 그것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작가가 감수해야 했던 웃지 못할 경험담의 형태로 작업에 기록된다. 영상 속 풍경은 비단 시공간을 넘은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작은 스코프 하나를 둘러싼 수소문의 과정, 수입 및 허가 절차, 소요 시간과 비용 등 부조리한 크기의 방황을 함축한다. 

「낭독방」(2013)은 노래방 기계를 차용하여 시 낭독을 기능으로 부여한 작업이다. 작가는 시와 노래방을 ‘텍스트를 따라 읽는다’는 공통점에 끼워 결합하며, 둘 다를 사회에서 통용되는 형식과 다른 자리로 옮겨 놓는다. 여기서 노래방은 흥에 겨워 감정을 분출하는 세속적 놀이 문화가 아니라, 절제된 서정적 텍스트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하는 낯선 의식의 장소가 된다. 또한 시는 과거의 유물이나 소수 취향의 독백에 그치지 않고, 심정을 노래한다는 본연의 목적을 돕는 육신을 얻는다. 「낭독방」은 관조적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관객이 그 안에 들어가 원하는 작품과 배경을 선택하고 자신만의 시 낭독에 사용할 때 완성된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습기도 하고 생경한 광경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화면에 나타나는 시 문장을 마이크에 대고 읽는 순간은 세속과 이상의 간극을 가로지르는 극적인 경험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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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울_잔반처리_사진, 단채널 영상_가변설치, 01:07:02_2013

식당에서 먹다 남은 음식으로 만들어지고, 다시 곧 퇴식구로 사라져 간 김한울의 작은 기념비에 대하여

김한울은 일상 속에서 느낀 사소한 불편함을 예술적 방법으로 해소하는 작업들을 보여 준다.「잔반처리」(2013)는 그중 하나로서,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남은 음식들을 한데 모아 식기를 반납할 때, 뒤죽박죽이 된 음식을 보는 불쾌함을 해결해 본 시도였다. 작가는 잔반을 마치 새로 나온 음식처럼 재구성하고, 이를 식기와 함께 미적으로 연출하면서 작은 조형물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완성된 작품은 퇴식구를 통해 식당 직원에게 전달되었다. 「잔반처리」는 여러 군데의 식당을 돌면서 총 12번 진행된 그 과정을 기록한 영상과 결과물을 찍어 둔 사진으로 구성된다. 이 작업은 뱅크시의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2011)가 인상적으로 소개하는 거리 미술(street art)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동안 거리 미술은 지나친 상업화나 언론 플레이로 오염되었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 나타나는 거리 미술의 매력은 부정하기 힘든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거기서 예술이 자청해 떠안는 불안한 조건이다. 길가의 벽 아무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법이므로, 작가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서 밤에 어렵사리 작업을 완성해도, 그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 공무원들에 의해 지워진다. 여기서 미술은 으레 파괴당할 것을 전제로 태어난다.「잔반처리」는 가장 비천한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음식 쓰레기를 미적 대상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이 작업은 특별한 존재로서 다뤄야 할 물신적 오브제로 남기는 게 없다. 오히려 작가는 잔반 조형물이 완성된 직후 관객들(즉, 식당 아주머니들)의 손에 파괴되도록 함으로써 작업 의도와 과정을 그 산물보다 기념할 만한 것으로서 조명한다. 그녀가 식기를 탑처럼 쌓아 만든 몇몇 조형물은 마치 작은 기념비처럼 보인다. 이제 사진만 남은 그것은 아우라도 없고 위용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평범한 식당에서 일어난 작은 해프닝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기록한다. 여기에 미술 제도의 후광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잔반처리」의 과정을 지켜본 식당 직원들 중에는 김한울이 만든 조형물이 예쁘다며 좋아하는 이도 있었지만,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며 주의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것은 예술이다, 라고 단언하는 제도적 조명과 권위적인 해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업에 작게나마 아름다움이 묻어난다면, 거기에는 고상한 미술관에 품위 있게 놓인 작품들과는 또 다른 예술적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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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_NO FUTU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2013

​김혜리_두 개의 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224cm_2013

작가가 아닌 타인의 그림을 예술로서 재조명할 무대가 되는 김혜리의 회화에 대하여

김혜리의 회화에서 보이는 드로잉의 출처는 타인의 그림이다. 작가가 아닐뿐더러 미술을 특별히 배우지도 않은 이들의 그림은 때로 전문가의 작업에서 보기 힘든 매력을 갖는다. 미숙한 표현력에서 비롯된 이런 그림에는 비정형의 형식, 또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속마음과 같은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김혜리는 이런 매력을 자신의 작업에 차용하되,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진부한 메시지를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물음은 비전문가가 낙서하듯 그린 그림을 어떻게 예술로 만들 것인가에 가깝다. 즉, 여기에는 이미 예술과 비예술의 갭이 전제되어 있다. 단순한 낙서로 보이는 그림은 사람들의 시선을 잘 붙잡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그림을 관객들이 관심을 갖고 그 의미를 숙고하는 대상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녀는 타인이 그린 드로잉의 형태는 크기만 키워 그대로 가져오되 그 뜻은 재해석하며, 또 물감을 수없이 겹쳐 뿌리는 독특한 기법으로 거기에 깊이감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김혜리의 회화 작업은 타인의 그림을 예술로서 등장시키기 위한 ‘무대’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그녀가 완성한 작업 속의 드로잉은 어떤 의미로는 이물질이다. 그것은 예술이 된 후에도 어디까지나 남의 것이자 서툰 것이라는 원래의 의미를 간직한다. 작가는 이미 있던 낙서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하고, 아는 누군가에게 특정 주제로 그림을 의뢰하기도 한다. 그렇게 준비된 드로잉에 배경과 텍스트를 부여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다. 이런 작업 프로세스는 감각적 언어로 쏠리기 쉬운 회화라는 형식에 비평적 색채를 깊이 가미한다. 다시 말해, 김혜리의 작업은 화면 안에 도입된 회화적 기법뿐 아니라, 그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과의 대화를 통해 의미심장한 깊이를 나타낸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의 작업들이 공유하는 테마는 가족이다. 가족은 나와 가장 친밀한 존재로서, 편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하며, 어쨌든 나 자신일 수는 없는 타인이다. 특히 젊은 작가에게 가족은 최대의 후원자인 경우가 많고, 따라서 그 결실에 일정한 지분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작업들은 가족을 전면에 등장시킨다. 작가가 그녀의 후원자를 오히려 뒷받침하는 아이러니한 위치로 물러날 때, 회화는 미적 표면을 넘어서는 보다 넓고 이질적인 관계를 끌어들이며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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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호_log out_캔버스에 유채, 천_130.3×162.2cm_2013

작금의 일상 속에서 다양한 비약을 종횡무진 감행하는 백경호의 농담에 대하여

백경호의 회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복잡한 플롯이다. 그가 구성한 화면은 마치 소설이나 협주곡이 그런 것처럼 다양한 요소가 혼재하며 상이한 층과 굴곡들을 만든다. 더 자세히 보면, 혼재의 느낌이 강한 것은 구성 요소들 간의 단락 때문이다. 작가는 종종 하나의 화면에 원근법적 구도와 평면적 화법, 원색과 탁색, 기하학적 형태와 우연한 물감의 흐름, 애매한 추상적 표현과 만화처럼 단순한 캐릭터 등을 함께 배치한다. 그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이런 상반된 것들 사이를 넘나드는 비약의 산물이다. 작가 자신도 이를 ‘넌센스’라고 부를 때가 있는데, 그럼에도 그는 이런 혼란한 전개를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낸다. 회화에 통일감을 주는 것은 특정하기 힘든 절묘한 균형이다. 아마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 – 평소 대화에서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시각적 서술에 있어서는 –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소설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백경호의 회화는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실제 일상에서의 이야기를 종종 반영한다. 그 내용은 고단한 삶의 경기장에 난입한 망상, 작가의 작업실에서 생긴 돈 문제, 혹은 스마트폰이 있는 지하철 풍경 등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단절된 것들의 공존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최근 관심사들 중 하나인 디지털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그것 자체의 근본 원리가 아날로그의 연속성과 대비되는 단절을 전제하기도 하지만, 디지털 사회로의 급속한 전환과 함께 변화하는 삶의 방식들과 증가하는 문화적 복잡성도 어떤 비약을 암시한다. 이는 회화를 하는 예술가에게도 고민을 안기지만, 그 밖의 수많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는 시대적 현실이다. 작가는 이처럼 일상적 삶의 모습을 한 보편적 비약에 주목하며, 다시 그 내용을 회화적 언어로 바꿔 농담처럼 제시하곤 한다. 

농담은 그 내용이 뻔한 부조리를 담고 있음에도 공감을 낳거나, 혹은 현실적 난관을 가볍게 우회하는 말로 안도감을 줄 때 웃음을 낳으며 성공한다. 갈수록 복잡하고 수상해지는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공감할 만한 넌센스는 사방에 많다. 그러나 그것을 희극적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 사회나 개인이 실제 경험하는 단절과 부조리는 종종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는 작가가 작업 제목에도 썼던 말처럼 사생아를, 즉 사소한 의미로든 심각한 의미로든 버려진 것으로 낙인 찍힌 불행한 존재들을 낳는다. 백경호의 회화가 빚어내는 혼란한 감각은 이런 시대상을 그리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리고 비약과 넌센스를 회피하거나 불편하게 조명하는 대신 오히려 심화하며 즐기는 감각을 통해, 그는 시대적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선 굵은 농담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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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찬송_찾아가는 대중미술 no.1_단채널 영상_00:02:40_2013

미술을 밖으로 나가 팔면서 말 그대로 ‘팝아트’로 만든 우찬송의 모험에 대하여

우찬송이 「찾아가는 대중미술 no. 1」(2013)을 제작한 의도는 다음과 같다. 동시대 미술이 겪어 온 역사에는 조형적 아름다움이나 예술의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 외에, 미술의 공공성 또는 대중성에 대한 고민도 큰 비중으로 존재한다. 후자는 주로 미술관 등의 개방된 장소에서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고 시각적 향유를 장려하는 형태로 추구된다. 예술계가 쓰는 ‘대중’이라는 말에 그어진 이런 한계에 의문이 든다. 미술관을 일부러 찾는 소수의 사람들이 대중을 충분히 대변하기는 힘들 듯하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더 많은 사람들, 이를테면 우리 주변의 동네 사람들도 포괄하는 것이 진정한 대중 개념이다. 작가는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대중미술 프로젝트의 첫 번째 과제로 방문 판매를 선택했다.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처럼 누구나 쉽게 구입하고 소유할 수 있어야 대중미술이다. 그래서 우찬송은 지체 없이 팝아트가 연상되는 햄버거 오브제를 만들어 동네로 나가 야채장수 아저씨처럼 확성기로 광고하며 팔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는 고급과 저급 문화의 경계를 해체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런데 이미 미술사에서 정전(canon)이 된 탓인지,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그의 작업들은 꽤나 고급스럽다. 워홀 이후로 현재까지 등장한 다른 유명한 팝아트들도 비싸긴 마찬가지다. 팝아트는 대중문화나 하위문화 이미지를 차용해 그 정체성을 확보하지만, 대개 그 종착역은 미술 시장을 비롯한 제도적 후광에 힙입어 새로운 형태의 ‘고급 미술’로 거듭나는 것이다. 아마 이는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적 우상(즉, 아이돌)을 만들어 내는 팝 문화의 일반적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찬송은 흥미롭게도 이런 문화적 구조를 뒤집는다. 대중미술 – 이를 영어로 직역하면 ‘팝아트’에 다름 아니다 – 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방문 판매에 나서면서, 그녀는 제도적 기름기가 보기 드물게 쏙 빠진 퍼포먼스를 펼친다. 그 의의는 단지 팝아트를 비꼬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찾아가는 대중미술 no. 1」에서 주목할 점은 작가가 지극히 수수하게 동네를 돌아다니는 중에도, 거기에 평범한 일상과 섞이지 않는 뭔가 ‘예술적’인 것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작업은 고급 미술의 제도를 거슬러 순수 예술이 존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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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훈_응급처치_철제 프레임 구조물, 인공 조명, 소리, 영상 모니터_가변설치, 180×240×260cm_2013

​홍지훈_죄와 벌_단채널 영상, 무음_00:07:25_2013

사회의 어느 한 곳에서 욕망을 조명하여 사건 현장을 만드는 홍지훈의 모험에 대하여

홍지훈은 그의 관심을 끄는 대상의 어두운 부분, 즉 욕망이나 허무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 왔다. 그가 파고드는 대상들 중 대표적인 것이 탄산음료 캔이다. 그것은 속이 부글거리는 액체와 기체로 가득하며, 자본의 욕망이 잘 나타나는 대량 생산품이며, 음료가 나오는 구멍 디자인이 특이하고, 흔들어서 따면 하얀 거품이 넘친다, 등등. 작가는 일단 이런 징후에 주목하면 여러 작업에 걸쳐 거기에 천착한다. 또 한편, 사회와 개인의 욕망을 겹쳐 놓는 메타포 역시 그의 작업 특징들 중 하나다.「죄와 벌」(2013)은 나체의 남자가 철근을 들어 똑바로 세우려고 애쓰는 퍼포먼스를 담는다. 길고 굵은 이 철근은 욕망을 상징하며, 그 무게로 인해 남자는 자기 욕망에 매달리는 것 자체로 위협적인 좌절을 맛보며 처벌받는다. 그리고 이때 하나 더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있는 옥상의 배경에 펼쳐지는, 철근으로 지어져 높이 치솟은 빌딩들의 숲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욕망의 징후를 탐색해 가던 홍지훈은 2013년 여름, 폭발물 소동에 휘말렸다. 그는 당시 탄산음료 캔을 사제 폭발물처럼 연출하는 작업,「I.E.D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자료 사진을 찍으려고 아파트 옥상에 두었던 그 오브제를 누군가 신고했고, 군경합동조사단이 출동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이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닌, 그로서도 불편한 해프닝이었다. 다만 이 사건은 그의 작업 취지를 반증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뉴스 보도를 비롯한 일련의 사회적 반응은 한편으로 희극적인 오버액션처럼 보이지만, 사정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그 ‘폭발물’은 정말 두려울 만한 대상이다. 작가의 욕망은 이런 오해의 틈으로 뜻하지 않게 분출되었고, 그 결과로 남은 것은 흥분이 아닌 씁쓸한 허무함이다. 

이 사건은 작가를 비평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홍지훈의 작업이 만드는 장면들은 사건 현장에 비할 만하다. 이런 성격은 개인의 욕망과 허무를 표출하는 일, 혹은 평범한 사회의 한 지점에서 그런 욕망을 조명하는 일이 풍기는 불온한 느낌에 기인한다. 아니면 허무의 순간에 뒤따르는 비참한 기분도 거기에 일조할 것이다. 「 I.E.D. 프로젝트」를 한데 모으는 작업「응급처치」(2013)는 그 제목에 두 가지 의도를 함축한다. 예술을 통해 출구 없는 욕망을 일부나마 구원한다는 것, 그리고 ‘어둠’을 없는 것 취급하는 현실에 급제동을 건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런 의도를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하면서 겪는 실질적 부담, 또 잠재적 위험은 그의 어둠에 내밀한 서사를 넘어선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응급처치」 이후로도 그의 편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황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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