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페브르가의 극장 3년 II

The theater of Boulevard Lefebvre, three years II

2011 10.13 ~ 2011 11.03

예기展 / Ieggi KIM / photography 

르페브르가의 극장 3년 II

예기_임마누엘 1_피그먼트 프린트_65.62×75cm_2011

르페브르가의 극장, 3년

‘관음조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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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작업은 예기가 살던 파리 아파트 건너편, 20미터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는 이웃 건물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찍은 사진 시리즈이다. 마주 보는 건물, 가까운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찍는 것이기에 작가는 모르게끔 숨어서 작업을 했고, 따라서 사진에 담긴 인물들은 그녀의 존재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 나는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뒤로 그들을 몰래 관찰해 왔고, 여러 해 동안 보아왔기에 그들 대부분의 얼굴은 내게 익숙하다.” (작가 노트 중에서) 그녀는 3년 동안 관찰해온 앞쪽 건물을 『르페브르가의 극장』이라고 이름 지었다. 르페브르는 바로 그녀가 오랫동안 살았던 파리 거리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딴 극장은 숨은 관찰자로서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들이 나타나는 하나의 연극적 공간이며, 기다림 끝에 이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연극의 주인공들이다. 물론 이 연극은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단 한 번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며, 더구나 극도로 짧은 단막극이다. 르페브르 극장의 (특히 발코니) 등장인물들은 실제로는 텔레마케팅 회사의 직원들이다. 그들은 하루 노동 시간 중 극히 짧은 순간, 전화 한 통화, 담배 한 모금, 또는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을 갖기를 위해 무대에 오른다. 하루 노동의 피로와 삶의 애환이 배어 있는 곳,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은 마르고 건조한 사막 한 가운데 존재하는 차가운 오아시스이며, 숨쉬기 위한 구멍이다. 
 

예기_임마누엘 2_피그먼트 프린트_55.41×55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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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_임마누엘 텍스트_피그먼트 프린트_35×55cm_2011

2. 한편, 3년의 시간이 쌓여도, 이곳에 나타나는 주인공들과 예기 사이에는 좁혀지는 않는 실제적이자 절대적인 거리가 있다. 그러한 거리감은 그들을 서로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들은 예기로부터, 그리고 예기는 그들로부터. (작가 노트에서) “이러한 거리감은 사진의 객관성을 만들어 낸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초기에 그러한 생각을 했었다. 따라서 초기의 몇몇 텍스트들은 사건에 대한 기술에 치우쳐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나의 태도는 바뀌어 갔다”. 왜냐하면 그들을 관찰하게 됨으로써 예기는 주인공들의 이곳에서의 삶에 개입하게끔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3년에 걸친 그녀의 관찰은 주인공들에 대해 꽤 다양한 지식을 갖게 해 주었으며, ‘무대 위’의 상황을 주관적으로 짐작하고, 상상하게 끔했다. 그녀는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의 대화를 자기의 것과 섞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고’ 함으로써, 공간적 거리를 넘나들며 그들과 동화를 이루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과 ‘나’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작가 노트에서) “3년간의 고립된 나의 일상은 이 작은 세계 안에서 지극히 세심하고, 지극히 내적인 것으로 되어갔다. 건물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 하나도로 흥분되었고,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의 작은 변화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숨기고 “남”을 엿보는 이 일에 기묘한 쾌감을 갖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놀 거리를 포기하는 것, 의미 있다고 생각하던 것을 포기하는 것, 흥미로움을 포기하는 것, 그럼으로써 가장 재미없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 것, 가장 의미 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것, 가장 지루한 것에서 흥미로움을 발견하는 것, 바로 그것이 관음자로서 예기의 주된 일이다. 그렇다면 삶의 뒤쪽에 위치함으로써 일상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건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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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_로보캅이다! 1_피그먼트 프린트_24×18cm_2011

3. 바라보기 (looking)는 어떠한 의미에서건 심미적 쾌락과 결부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시각적 충동과 시각 애호(scopophilia)증은 쾌락의 개념과 관련을 갖는다. “인간은 늘 주위의 사물과 이미지를 쳐다보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보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라보기’는 단순한 쾌락 이상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바로 주체의 참여를 포함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차원은 바라보기를 보다 중요한 그 무엇으로 이해하기끔한다. 어떠한 의미로는 바라보기에서 대상이 가진 것은 바라보는 행위자가 부여하는 의미에 비해서 덜 중요해진다. 무엇보다도 시각 애호가에서 쾌락은 보인 대상, 상대 이미지에 의해서 그 유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개별적 주체들이 부여하는 의미와 중요성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인다. 예를 들어 『르페브르가의 극장』을 바라보는 관음자에게 있어서 쾌락을 결정하는 대상은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다른 관점으로부터 볼 때 모든 대상은 쾌락의 대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쾌락은 타자를 바라보는 주체의 행위 그 자체로부터 획득되는 성격의 것이다. 그것이 관음자의 쾌락을 더욱 은밀하고 내적인 것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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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_로보캅이다! 2_피그먼트 프린트_30×54.98cm_2011

4. 이 사진들은 20미터 거리도 채 안되게 마주한 건물에서 일어나는 일을 찍은 사진이고, 넓게는 시각 애호증, 좁게는 예기의 관음증에 관한 것이다. 관음증이란 분명 뒤틀린 취향이다. 숨어서 엿보기는 오늘날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써의 언제부터인가 우리 일상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관음증을 이용하여 세계인의 시각을 사려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여자들이었고, 그녀들은 자신의 집안 내부에 카메라를 설치, 사생활을 엿보게끔 함으로써 유명해지기도 했다). 오늘날은 공공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차원에서 엿보기가 고무되기도 한다. 도시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며 공익요원들이 대상을 관찰, 감시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행위를 엿보기가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있다. 그는 남을 엿보면서도 자신을 책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엿보기의 한 형태이며, 단, 이 경우 공식적으로는 쾌락을 제공받지 못한다. 공공의 목적을 벗어난 또 다른 종류의 엿보기도 있다. 예기는 한 회사 건물 입구의 안내데스크에서 일하던 젊은 여직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당시 여직원은 광화문에 위치한 대형 신 건물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하는 일은 건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친절히 맞이하고 건물의 안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시 설치된 감시카메라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카메라는 그녀의 출-퇴근 시간 동안 가동되며, 아래 층 구석에 마련된 작은 카메라 감시실에선 고용된 남자들이 전송된 그녀의 모습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일상 속에서의 보편화된 엿보기 행각에 속하는 것들이다. 엿보기는 때론 금지된 것을 탐하는 왜곡된 성적 집착을 드러내며, 또 때론 피상적이나마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고, 또 때론 사조직의 이익에 봉사하는 감시적 눈을 대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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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_르페브르가의 극장 3년 II展_송원아트센터_2011

5. 그러나 예기는 또 다른 성격의 엿보기, 관음증을 말하고 있다. 앞서 환기된 관음행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 말이다. 이 새로운 의미의 관음증은 뒤틀린 욕망에 물들지도 않았으며, 아직 생존에 찌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의 질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는데, 그것은 이것이 분명 관음증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음증이 가진 내적 모순은 극복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모순이란 때론 매우 흥미롭고, 또 때론 고무적인 것이다. 이 모순을 내포하면서, 옳고, 그름의 경계에서 위태하나마 대상을 유희하는 것에 급급한 것이 이 관음증의 내용이다. 이것을 예기는 새로운 의미의 ‘관조’라고 이름짓는다. 긴장감, 위험을 포함하는 의미의 관조 말이다. 관음자는 위태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관음자는 언제 들킬지 모른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들키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 경험이 더 스릴있고, 긴장감 속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숨어서 바라보는 이 긴장된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흥미로워진다. 지나치게 사소한 사건이라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 된다. 자신의 존재를 전달할 힘을 가지지 않는 지극히 미묘한 사건이라도 신기한 사건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음-관조 (관음조)를 예기는 짝사랑이야기라고 말한다. (작가 노트에서) “『적도의 꽃』에서 안성기가 여인 장미희를 망원경으로 엿보면서 위태로운 사랑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것 말이다”. 

6. 관음의 행위는 너무나 은밀하기 때문에, 자제하도록 도와줄 외부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보고 있는 것 안으로 그야말로 점점 깊이 끌려들어가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지고 만다. 이러한 관음(관)조증이 흥미로운 것은, 바라보는 사람의 어둡고 깊은 눈 안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유일한 것으로 꽃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어둠의 꽃이다. 드러난 대상은 객관적으로 대대적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음자에게는 그것이 쾌락의 대상이다. 쾌락은 대상으로부터 비롯되기 보다는 바라보는 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대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본다는 것은 – 바로 그 은밀한 내적 관조의 성격으로부터 – 대상이 그 숨겨진 의미를 발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모순들의 다이나믹한 충돌을 경험하기 하며 부단히 우리 주변을 배회한다. (작가 노트에서) “이 새로운 의미의 관음(관)조증은 들키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훔쳐보려 한다. 그것에는 스릴감, 어두움, 긴장감, 유희감, 음험함, 어리석음, 신선함, 신성함이 뒤섞여 있다. 실같고 자그맣게 반만 뜬 눈에, 누구보다도 크고 둥굴게 부풀은 안구를 갖고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세상의 것들을 훔쳐보기에 좋은 눈이지 않는가?” ■ 김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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